소안도 항일운동

소안도는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항일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곳으로
독립군자금 모급과 노동사·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 소안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고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곳이다.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 항일운동 기념탑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시대 소안도는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 중 하나였다.
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 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로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의 밀고로 이순보, 이강락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당했다.

이준화는 동학군과 함께 도피한 뒤 살아남아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겹해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한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 운동을 이끌었다. 후일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 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 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리 수 있었던 것은 '중화 학원'과 '사립 소안 학교'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 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됐다. '중화학원'이 '사립 소안 학교'의 모태가 됐다

감옥 간 형제들 생각 겨울에도 이불 덮지 않고.

1905년, 궁납전이돈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 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소안 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소안 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924년, 2차 소안 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을 큰집처럼 드나들었다. 1920~19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 백 명에 달한다. 기록만으로도 뜨거웠던 항이르이 열기가 짐작된다.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 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1927년, 마침내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 시켰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오랜 시간 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수 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다. 송래호 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 하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안도 항일 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항일 독립 운동 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됐고 해방 60년이 넘은 최근에야 독립운동 기념관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