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한양대의 박찬승 교수는 소안도는 양반층 혹은 지주층이라 할 만한 계층이 없이 대부분 평민층과 자작농층으로 구성되 어 주민들 상호간에 갈등의 소지가 적었다는 점, 한말 토지회수투쟁과정을 통해 주민들 간에 단합이 강화되었던 점, 다른 곳에 비해 일찍부터 신교육을 시작하여 문맹이 거의 퇴치될 수준에 이른 점, 지리적으로 중요한 항로에 자리해 외부 세계, 근대문명과 접할 수 있었던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진보적인 의식에 일찍 눈을 떴던 김사홍, 김경천, 송내호, 송기호, 신준희, 최형천, 강정태 등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립소안학교
1920년대 후반에 운동의 지도부들이 대부분 옥고를 치렀고, 소안학교는 폐교되었다
그리고 끝내 송내호마저 옥중에서 병을 얻어 서거하면서 소안운동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소안학교와 운동의 과정에서 송내호 등의 지도를 받은 새로운 운동세대들은 1930년대 완더 일대의 적색농민조합운동에 참여하며 맥을 이어갔다.
올바른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갖춘 지도자와 이를 수용할 주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소안 사람들의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그 동안 소안도에서 당시 항일운동 관련 독립유공자로 19명이 등록되었으며, 금년에 그 동안 조선공산당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되었던 정창남이 유공자로 추가되어 모두 20명으로 늘어났다.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에서 확인한 항일운동 관련자는 모두 88명이지만 유공자로 20명이 지정되었고 나머지는 입증자료나 사회주의 활동경력 등이 문제가 되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변화된 정세에 맞춰 독립유공자의 범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어 이후 유공자등록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이며,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의 개관과 함께 형식적인 사업들이 아닌 소안정신을 담은 기념사업도 본격 추진되길 기대한다.